얇고 넓은 관심사 덕에 유튜브 알고리즘이 열일한다.
내 고질병이 하나 있는데, 맥시멀리스트에 보부상이라는 거다.
나이가 마흔이 훌쩍 넘었는데 아직도 못 고쳤다.
그래서인지 알고리즘이 국적 불문하고 자주 물어다 주는 게 여행 가방 싸는 영상, 여행 유튜버의 해외 쇼핑 영상, EDC 추천하는 아저씨들 영상이다.
새로운 편리 물건들 신기해서 멍하니 보다 보면 시간도 잘 간다. 물론 물욕도 같이 올라간다.
귀 팔랑거리고 물욕 많은 사람 특성상 좋은 거 보면 사고 싶어진다.
그렇게 산 (남의 EDC 이제는 내게도 EDC) 다목적 툴도 있다. (여행용 손톱깎이 베이스 멀티툴이라든가.)
근데 가방은, (캐리어보다 기내 반입형 백팩 파인데) "오 좋은데?" 하면서도 이상하게 살 마음까진 안 든다.
그게 신기하다.
국내외 가방 매니아들이 많이 추천하는 트래블 백팩 브랜드는 대략 이렇다.
에어, 노매틱, 코토팍시, 샘소나이트, 툴레, 오스프리, 벨로이, 팩세이프, 팩트, 파타고니아, 이글크릭, 탐탁.
신제품 나올 때마다 광고형, 분석형 영상으로 다 보고 있다.
다 좋아 보인다. 각각 장점(큼)도 단점(작음)도 뚜렷하다.
근데 지금 쓰는 게 편하고 만족스러워서인지, 너무 고기능인 것까진 필요 없다고 생각해서인지, 확 돈을 쓰게 되지는 않는다. 새것에 돈 쓰기가 아까운 상태랄까.
그래서 갑자기 내 낡은 여행 가방 얘기를 하고 싶어졌다. (의식의 흐름.)
십몇 년 전에 사서 아직도 쓰는 가방은 아이띵소의 캡슐백이다.
아이띵소는 종로구 이화장길에 쇼룸을 둔 국내 가방 브랜드인데, "I THINK SO, 나도 그렇게 생각해"라는 이름처럼 실용적이고 담백한 일상·여행 가방을 만든다.
캡슐백은 보통 국내 2박 3일 여행에 메인 가방으로 쓰거나, 쇼핑할 게 많은 근거리 3박 4일 여행엔 빈 캐리어 + 기내용 백팩 세트 구성으로 쓴다.
사회 초년생 시절에 어스백 하나를 사서 잘 쓰다가 브랜드에 호감이 생겨서 캡슐백을 하나 더 샀다.
(어스백은 종로 대형서점 입점 샵에서, 캡슐백은 텐바이텐에서 샀던 것 같다.)
둘다 지금까지 아주 잘 쓰고 있다. 많이 걷지 않는 여행에는 어스백도 아직 활약하고 있다. (지금은 숄더로 많은 짐을 지기는 좀 그랴...)
그때 내가 봤던 브랜드가 아직 살아남아서, 비슷한 곤조의 제품을 지금도 내고 있다는 게 좋다.
그 두 가방의 편함이 나를 아직도 이 브랜드에 붙잡아두는 것 같다.
그 좋은 기억으로 여행용 백팩 하나랑 젯셋 크로스를 더 샀다.
작은 트래블 백팩은 좀 걷는 1박 2일 국내용으로 쓰고있다.
다시 남의 좋은 가방 얘기로 돌아와서.
유튜브 전문가들은 가방 분석할 때 수납, 편의, 착용감, 보안, 디자인을 다 본다.
근데 나한텐 그렇게 고기능까진 필요 없어서인지, 캡슐백이 모든 조건을 만족하진 않아도 나머지 단점이 눈에 안 들어오거나 알아서 보완해서 쓰는 정도의 애정으로 아직 잘 쓰고 있다.
- 수납 — 공간 넓고 180도 펴진다. 노트북 포켓, 자체 비닐 파우치, 메인 수납공간에는 엑스자 밴드까지 있다. (물론 내 엑스자밴드는 이제 고무가 삭아서 좀 힘이 없다)
- 편의성 — 백팩형 어깨끈에 크로스 스트랩까지. 세로로 들기, 가로로 들기, 어깨로 매기, 크로스로 매기 다 된다.
- 보안 — 이것만은 개나 줘라 수준이다. 근데 어차피 위험한 동네는 안 다니니까. (그레이트 쫄보.) 그래도 혹시 몰라 다이소제 TSA 자물쇠로 지퍼끼리 걸어놓고 다닌다.
- 착용감 — 과하게 푹신한 감은 있지만 나한텐 좋다.
- 디자인 — 심플해서 좋다. 마이너스 포인트는 아니다.
너무 많이 쓰고 빨아 써서 지금은 앞 포켓 지퍼 바느질이 풀렸을 정도가 됐다.
얼마 전엔 같은 가방을 든 방한 일본인 관광객을 만났다.
그쪽은 네이비.
"오, 저도 이 가방 빨간 거 써요. 편하죠?"
"한국 여행 처음 왔을 때 샀어요. 옮겨갈 가방이 없어요."
"아 맞아요, 저도요." 하고 스몰토크를 꽤 길게, 즐겁게 나눴다.
십몇 년 된 가방 하나로 낯선 사람이랑 이렇게 대화가 트인다는 게 재밌다.
좋은 물건은 이렇게 오래 남아서 예상 못 한 순간에 사람을 이어주기도 한다.
새 가방은, 글쎄. 아직은 지금 이게 좋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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